나는 유행과 패션이 통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그냥 남들이 흉보지 않을 정도로만 대충 입고 사는 그런 사람이다. 그런데 간혹 텔레비전의 수많은 채널을 서핑하다 보면, 패션과 유행이 대한 수많은 프로그램이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오호라! 나와는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나! 보구나.
그런데 가만히 보고 있으면, 참 신기하다. 무엇이냐 하면, 봄이 되면 가을옷을 보여주고, 겨울쯤 되면 봄옷이나 수영복 같은 것을 보여준다. 시간을 많이도 앞서가고 있다. 미래를 사는 사람들인 셈이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니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문제가 있다.
어떻게 사람들의 취향을 예측할 수가 있지?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 취향과 개성이 있는 법이지만, 또 많은 사람이 선호하는 유행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모순적인 상황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런 모순적 상황은 어디까지나 지금의 이야기일 뿐이지, 미래의 상황이 결코 아니다. 예를 들어 보자. "내년 봄에는 화사한 색상보다는 강렬한 원색계열의 물방울무늬가 인기를 끌 것이다."라는 유명 패션 디자이너의 말이 있다고 하자. 물론 가정이다. 실제로 저렇게 입고 다니면 매우 유치할 것이지만, 여기에서는 단순한 예시일 뿐이다. 그렇다면 내년 봄이 많은 사람이 화사하고 부드러운 색상보다는 강렬한 원색을 선호할 것이라는 주장이 과연 어떤 근거에서 나온 것일까? 사람의 취향을 예측한다는 것은 이론적으로 말이 안된다. 그렇다면 저런 유명 디자이너들은 점쟁이들인가?
여기서 잠깐 떠오른 몇 가지 생각이 있다.
#_1
"대다수의 사람은 수동적"이라는 가정. 즉 유명인이 이러이러한 패션을 하고 다니면 많은 사람이 수동적으로 따라할 것이라는 기대에 의지하여 미래의 패션에 대한 "선언"을 감행한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실제로 어느 정도는 사실인 듯하다. 만약 그렇다면 디자이너라는 사람들은 자기가 선언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미래를 예측한 사람이 된다. 참 편리하다. 하지만 세상은 이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이런 현상이 실제로 발생하지만 그것은 국지적이거나 수명이 매우 짧다. 즉, 이런 현상은 trend라기보다는 fad에 더 가까운 것이리라.
#_2
그렇다면 소위 디자이너라는 사람들이 사람들의 취향을 예측한다는 행위는 어떤 목적을 위해서인가? 그들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아마도 "곧 이런 스타일이 유행할 것이니 이런 옷을 구입하세요."라는 메시지일 것이다. 디자이너들이 꼭 이렇게 할 필요가 있을까? 그냥 이것저것 사람들 취향에 따라 각각 다른 옷들은 많이 팔기만 하면 될 것을 왜 꼭 스타일을 한정시키는 것일까? 그것은 아무래도 불확실성을 감소시키려는 목적이 있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미래를 예측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인데, 게다가 그것이 대상이 논리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취향과 관계된 것이라면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높은 불확실성을 감소시키고자 유행에 대한 예측이라는 것을 하고 자신은 그것에 투자를 하게 되면 실패의 확률은 많이 감소할 것이다.
#_3
결국 유행이라는 것은 외부적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인데, 언제나 그러한가? 수용하는 사람들은 아무런 판단의지도 없는 것인가? 사실 그렇지는 않다. 많은 사람이 유명인의 패션에 대해 악평을 하고 <올해의 워스트 드레서>라는 별 의미 없는 상까지도 만들어 내는 것을 보면, 일반 사람들이 적어도 수동적인 단순 수용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유명 디자이너들의 예측대로 들어맞는가? 이것은 아무래도 담합이라는 것으로밖에 설명이 안 될 듯하다. 담합이라는 것은 보통 공급자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이런 스타일이 유행할 것이라는 디자이너의 선언이 실현되는 것은 그런 스타일의 패션들만 시장에 공급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담합이 공급자들을 넘어서 확장된다는 점이다. 사실 유행이라는 것 자체가 알고 보면 사용자들 사이의 인지적 담합행위이다. 그러므로 유행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단순한 수동적 수용자가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셈이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런 행위에 가담해야만 유행이라는 것이 더욱 강화되고 생명력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유행이라는 현상을 "불확실성의 감소"와 "인지적 담합"이라는 개념으로 생각해봤다. 할 일도 많은데, 별 쓸데없는 잡생각이 머리에 넘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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